버니니 학사의 찢어진 노트
지식학회 학사가 남긴 찢어진 노트다

버니니 학사의 찢어진 노트

*기록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주차]

과제 심사 결과가 나왔다. 경비가 반토막으로 줄었고, 과제 방향을 바꾸라는 「친절한」 제안이 적혀있었다. 선주로 파견되는 교류 인원이 줄어서 짜증이 나긴 했지만, 일리 있는 선택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민속 연구라는 게 상업적 가치가 없다 해도, 선주 사람들에게는 건질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오랫동안 학술 연구에 매진했지만 이렇게 열정과 결심이 사라지는… 아니, 소멸되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건 경비를 다 써버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곧 돈도 일손도 바닥날 텐데… 신혼인 토드에게 줄 야근비조차 없다. 과제는 무슨 과제! 십 년 안에 불로장생의 비밀을 풀겠다고 허풍을 떨었던 내가 정말 우습다, 하하……

*기록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주차]

학회 ███성 도서관 앞에 있는 라면 가게가 그립다. 추운 겨울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와 매콤한 라면을 먹으면 속이 풀렸다. 마늘, 고추, 고기를 추가하고 기름을 휘익 두르면 환상의 맛이 펼쳐졌는데! 돌이켜 보니 선주에서 대체 뭘 먹은 건지 모르겠다. 두유? 그건 쓰레기 처리 비용을 내고 버려야 할 정도다.

P.S. 남은 경비를 따져보니 마늘만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용 없이 기록 일자만 남아있다*

[██주차]

별뗏목의 바다에서 길을 잃은 탓에 굶어 죽을 뻔했다. 한 비디아다라족이 내게 밥을 사줬다. 그들은 품격 있는 종족임이 확실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뭔가 깨닫는 게 있었지만, 선명하지는 않다……

계속 버텨야 할까, 아니면 모두와 함께 선주를 떠나야 할까?
뭐가 됐든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고 불로의 샘에 담긴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고 자신을 믿어야 한다.

고되고 지친다. 나는 정말 무능하다.

[██주차]

██와 밥을 먹으며(물론 이번에도 얻어먹었다) 은하 내 다른 부락의 민속에 대해 얘기하던 중, 일부 부락에 전해 내려 오는 「불로의 샘」과 「신비한 해저왕국」 전설이 ██가 얘기한 비디아다라 신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지는 아직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들은 ██가 얘기한 비디아다라의 「옛일」을 과거의 추억쯤으로 여겼다. 그러니 그 구전된 신화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이자 학회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오른다…….

이번 주 계획:
1. 비디아다라족 자료 조사√
2. 선주 고전 서적 대출√
3. 문헌 정리√
4. 과제계획서 재제출×

[██주차]

이번 주 계획:
1. 비디아다라족 구전 역사 기록√
2. 과제 연구 계획 수정√

아니나 다를까, 학회에서 선주 사람의 장수 유전자에 관한 과제를 거부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아마 학회는 앞으로 큰 꼬리를 가진 이들의 신체 비밀을 캐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털북숭이 귀와 꼬리가 나는 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고, 실제 수명이 그다지 길지 않은 건 특정 세포의 최대 활성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았지만… 뭐, 천재는 늘 외로운 법이니까. 두고 보자고.

[██주차]

…██는 차가운 외모와 달리 속마음은 따뜻했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날 구하지도 않았겠지.
한번은 그를 따라 전설의 「인연경」에 갔는데, 구전 역사에 이런 유적까지 존재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옛일을 무의미한 기억으로 남기는 것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찬란했던 과거를 알릴 수 있게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내 의견에 ██도 동의했다.

비디아다라의 잉태 생태계는 정말 흥미로웠다. 물에 몸을 담갔을 뿐인데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자체 순환으로 배아를 부화시키는 방법이 있다니……

…비디아다라 알의 추출물을 손에 넣었다. 솔직히 주삿바늘이 「껍데기」를 뚫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돌아오는 길에 별뗏목의 바다에서 별뗏목과 마주쳤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예상대로 학회에서 새로운 유전자 염기서열분석을 시작했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주차]

토드에게 빨리 오라는 독촉 편지를 보냈다. 곧바로 출발하겠다는 답이 왔지만 시간을 맞추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주차]

…피부 탄력이 회복되고 모낭에서 자라는 모발 수가 늘어났다. 후자는 행복한 고민이다. 이런 골치 아픈 유전자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니… 성공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다.

세포 활성도가 평범한 비디아다라 수준에 도달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모낭의 재생 상태로 보아 이미 성공한 듯하다.

[██주차]

모발은 일정 수준까지 증가한 후 재생을 멈추었고, 그 후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 농도도 평균 수준에 달하지 못했는데, 추출물 부족으로 인한 현상인 듯하다.
██에게 부탁해 인연경에 또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지난번 연대기의 초고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주차]

훗, 성공이다!
성공이야!! 기나긴 선주 여정에 드디어 ████라는 종지부를 찍었다!
유운역여의 여주인이 오늘 아침 내게 객잔 서비스 만족도 조사를 부탁해왔다. ████████, 여주인은 전혀 날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아주 공손하게 「버니니 씨는 언제 돌아오시냐」고 묻고는 내가 이 방에 있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전 버니니 스승님의 제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얇지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변성기로 학교 합창단에 들지 못했던 14살 무렵의 시절이 떠올랐다.
여주인이 떠나고 나서야 거울에 비친 완벽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각상처럼 젊고 멋진 내 모습이라니…
으하하하핫!!!
학회에 돌아가서 유전자 인증만 받는다면 무한한 부와 권력, 그리고 연구 시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주차]

███████ 내가 ████████를 많이 잊어버린 느낌이 든다.
████ 난 잠을 ████ 훨씬 ████ 많이 자게 됐다.
일기 비밀번호 ████████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문 인식이 있기에 다행이지.
뭘 적어야 하나?
객잔 침대가 커진 것 같다… ████
몸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글자가 정체불명의 액체로 번졌다가 말라버려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다*